역사 속의 수의

수의는 시신에게 입히는 옷을 말한다.

수의(壽衣)는 사람이 타계하여 염습(斂襲)할 때 시신에게 입히는 옷을 말한다.
전통수의에서는 수의를 모두 새로 지어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소재 면에 있어서 전통수의가 모든 천연섬유를 사용하였던 것에 비하여 현행 수의는 소재에 있어서도 삼베 중심으로 되어 있다.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고서나 문헌에 우리나라의 상장례(喪葬禮) 및 수의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 있고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발달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國朝五禮儀」,「喪禮篇要」 등에 죽은자에게 입히는 복식(服飾)인 수의와 관련된 喪葬禮 절차가 잘 나타나 있다.

기본적인 절차나 방법에 차이가 없다.

조선시대 왕실의 수의 소재는 국조오례의, 국조상례보관, 조선왕조실록, 의궤 등에서 확인된다. 왕의 장례에는 직사, 광직, 라, 사, 초, 모단, 모시가 쓰였으며 왕비의 장례에는 금선, 필단, 향직, 주, 초, 사, 모단, 모시를 썻다. 삼베는 보이지 않는다.기본적인 喪葬禮 절차는 같으며 수의도 왕의 경우 稱數가 추가되는 정도였으며, 옷의 형태나 종류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자신이 입었던 옷이 수의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신분에 따라 절차나 의복의 칭수에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절차나 방법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삼베수의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수의는 생전의 예복과 같은 吉服으로서 가장 盛裝을 해 왔으므로 儒冠者의 경우는 公服을 사용하였으며 일반인들도 혼례 때는 사대부의 옷을 입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공복을 사용하였으며 결혼때 입던 예복을 수의로 사용하기도 하고 결혼복과 비슷하게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삼베수의 등장의 배경에는 죄인으로 형상화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쓰던 삼베수의를 보편화시킴으로써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정신을 피폐화하고 물자를 수탈해 가려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통에 바탕으로 미적으로 아름다운 수의를 개발함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비단, 명주 등의 견직물과 식물성 섬유가 함께 쓰였던 전통수의에 갑작스런 삼베수의의 등장은 일제강점기의 김숙당의 朝鮮裁縫全書와 조선총독부의 儀禮準則 公布, 삼베에 대한 왜곡된 속설의 믿음 등으로 인해 삼베수의가 확산 및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편적으로 한국 전통상례의 예법은 죽은 이에게 비단, 모시, 무명 등 고운 옷을 입혔고 삼베옷은 망자 본인이나 가족이 죄인임을 형상화하기 위해 입거나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었다. 전통에 바탕해 현대사회에 적용 가능하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수의를 개발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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